상자

고양이 집사 2012. 2. 20. 20:07


나는  다섯 살 때까지 외갓집에서 자랐다.

외갓집이라면 시골집의 풍경이라든가 밭일을 하는 할머니의 모습을 떠올릴 수도 있겠지만,

나의 외가는 서울 마포구 성산동의 2층 양옥집이었고, 지하에는 조그만 가죽 장갑 공장이 있었다.

공장장 삼촌과 열 명이 조금 안 되는 언니 오빠들이 있는 지하의 공장에서는 언제나 미싱 돌아가는

소리가 났다. 2층에는 가죽 원단이 잔뜩 쌓여 있는 방이 있었고, 겨울철이 되면 커다란 상자들에

가죽 장갑이 차곡차곡 담겨지곤 했다.

네다섯 살 무렵의 나에게 높게 쌓여 있는 '가죽의 방'은 혼자 하는 전쟁 놀이에서

'넘어야 할 산'이었고, 가죽 장갑을 담기 위한 빈 상자들은 적으로부터 몸을 숨기기 좋은

방공호였다. 어째서 네 살 짜리 여자아이가 혼자 전쟁 놀이 따위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,

그나마 전투에 참여하기보다는 도망을 가거나 숨는 쪽이었다.

그 상자들은 크기가 꽤 넉넉해서 내가 안에 들어가고도 뚜껑을 닫을 수 있을 정도였다.

몸을 접고 상자 안에 들어앉아 있으면 아무도 나를 찾을 수 없을 거란 생각에

혼자 즐거웠지만, 금세 좀이 쑤셔서 혼자 뛰쳐나오기 일쑤였다.

찾는 사람도 없는 숨박꼭질 따위가 재미있을 리 있나.

하지만 빈 상자만 보이면 매번 그 안에 들어가보곤 했다.


상자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 것은 아마도 사이즈가 맞지 않게 되고서부터이겠지만,

나이 서른이 넘어서도 냉장고나 세탁기를 보면 들어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.

친구와 함께 살 때, 친구가 가져온 커다란 양문형 냉장고를 바라보다가

그 안의 음식들과 선반을 전부 꺼내고 들어가본 적도 있었다.

시원하고 아늑했다.

좁은 공간에 몸을 접고 앉아 있을 때의 이상한 안정감.


그래서 나는 상자만 보면 억지로 몸을 구겨넣는 몽롱이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.







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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